군 전투용 차량에 탑승한 타이거 우즈와 최경주, 우승후 경례를 하는 허인회. [게티이미지, 중앙포토, KPGA]
동부화재 프로미 오픈에서 일병 허인회가 우승했다. 그가 한국 프로골프 대회에서 우승한 첫 군인은 아니다. 한국 골프 초창기인 1959년과 66년 한국프로골프 선수권대회에서 군인이 우승했다.
주인공은 한국군이 아니라 주한 미군 오빌 무디(1933-2008)였다. 프로골프 선수권은 프로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지만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아마추어인데도 출전했고 비교적 쉽게 우승했다. 2회 대회인 59년 그는 7타 차, 66년 5타 차로 우승했다. 실력이 출중했던 그가 60년부터 65년 사이의 KPGA 선수권대회 상위권에 입상자 명단에는 없다. 아예 출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디는 KPGA 선수권뿐 아니라 한국오픈에서도 챔피언이 됐다. 대한골프협회에서 발간한 한국골프100년사는 한국오픈 첫 회 우승자가 무어(Moore), 2~3회 우승자가 무디(Moody)라고 기록했지만 무디의 위키피디아에는 그가 한국오픈 1~3회 우승자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가 한국오픈 3회 연속 챔피언일 가능성도 있다.
오픈 대회에서 아마추어의 기록은 따로 게시된다. 무디는 아마추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가 워낙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프로로 인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디는 67년 전역했다. 2년 후인 69년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당시 14년간 복무하고 돌아온 군인 출신의 선수의 US오픈 우승이라고 화제가 됐고 닉슨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서 격려하기도 했다.
김학영 프로에 따르면 무디는 59년부터 61년까지 8군 사령관 카터 매그러더, 최세황 국방부 차관, 김프로와 함께 군자리 골프장 등에서 매주 라운드를 했다고 한다. 김프로는 “퍼트에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드라이버와 아이언은 국내 프로들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무디는 그린 키퍼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골프를 했고 오클라호마 대학 골프팀에 진학해 몇 주를 보내다 군에 입대했다. 미군 골프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골프광인 미 8군 사령관에게 차출되어 한국에 왔다.
무디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전역 후 PGA 투어에 가서 한 동안 성적이 별로였다. 김학영 프로가 지적했듯, 퍼트 때문에 그린 위에 올라가면 흔들렸기 때문이다. 69년 US오픈에서 우승할 때 그는 당시로선 낯선 역그립을 잡고 퍼트를 했다. 이후에도 퍼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디는 PGA 투어 250경기에서 단 1승(US오픈)만 남기고 시니어 투어 선수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요술 방망이가 다가왔다. 시니어 투어 동료인 찰리 오언스가 쓰던 빗자루처럼 긴 퍼터다. 집에서 만든 50인치 샤프트를 단 퍼터를 가져왔는데 그립 끝을 몸에 고정시키고 스윙해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 브룸(broom:빗자루) 퍼터를 발명한 사람은 오언스였지만 이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무디다. 89년 US 시니어 오픈에서 무디는 이 퍼터로 우승했다. 이후 샘 토랜스와 베른하르트 랑거, 비제이 싱 등이 이 퍼터로 재미를 봤다. 무디는 시니어투어에서 긴 퍼터로 11승을 했고 2008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과 인연이 있는 무디는 가장 유명한 군인 출신 프로골퍼가 됐다.
‘태국의 최경주’인 통차이 자이디(46)는 공수부대 출신이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개막식 때 낙하산을 타고 메인 스타디움에 내려온 대표온 엘리트 군인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몇몇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고 99년 제대 후 프로에 입문했다.
오빌 무디처럼 한국과 인연이 있다. 통차이의 첫 우승이 2000년 한국오픈이다. 통차이는 아시안 투어에서 최다승(13승)과 최다 상금을 기록 중이다. 유러피언투어에서도 6승을 했다. 최근 우승은 2014년 노르디아 마스터스로 당시 주가를 높이던 빅토르 드뷔송 등과 연장 끝에 우승했다.
그의 경기에서는 군인 특유의 강한 멘털이 자주 드러난다. 작은 체구와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유러피언투어의 젊은 거구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연장전에는 두 번 들어가 모두 이겼다. 그는 최경주처럼 늦게(16세) 골프를 처음 알았고 프로 전향도 늦었다. 그는 골퍼로서 성공한 이유에 대해 “먹고 살기 위해서 골프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아공의 쌍웅인 어니 엘스(46)와 레티프 구센(46)도 군인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징병제였다. 1988년 입대해, 한국군이었다면 전설적인 쌍팔년 군번이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에 입대해 2년을 군에서 보냈다. 구센은 “처음 신병 교육 3개월은 매우 힘들었지만 이후 공군에서 별다른 일 없이 장교 구두를 닦으며 지냈다”고 회고했다. 남아공 군대에서는 한국 군대의 전투 체육 비슷한 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수요일과 주말에는 골프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올해 프레지던츠컵 세계 팀 주장인 닉 프라이스도 70년대 후반 공군 파일럿으로 로데시아(현재 짐바브웨)에서 2년간 근무했다. 아널드 파머, 벤 호건, 샘 스니드 등도 군대에 갔다 왔다.
(제공=중앙포토)
한국 남자 골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두 선수인 최경주와 양용은도 군 생활을 했다. 둘 다 방위다. 최경주는 완도에서 근무했다. 이미지와 달리 취사반장을 했다. 골프를 하기 위해서였다. 최경주는 “취사병이 밤새 음식을 준비하고 이틀 후 복귀했기 때문에 낮에 시간을 낼 수 있고 골프 연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원했다”고 했다.
그는 “완도식으로 밥을 해주니까 현역장병들이 좋아하더라. 밤새 밥 해주고 낮에 골프 연습을 열심히 했다. 레슨을 하면서 용돈도 벌었다”고 말했다. 최경주는 "군대도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얼차려를 주면 체력훈련이라고 생각하고 받으면 쉽다"고 했다. 최경주는 방위출신이지만 육군 홍보대사다.
실제 군복무를 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군을 동경했던 골퍼는 타이거 우즈일 것이다. 타이거 우즈는 그린 재킷 보다 그린 베레에 더 관심을 가지던 시기가 있었다. 우즈는 2004년 유러피언투어 두바이 클래식 출전 직전 걸프 해역에 있는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함을 찾아 배와 전투기를 둘러 보고 “내 생애 가장 즐거운 오후였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우즈는 몇 개월 후 마스터스가 끝나자마자 자원해서 나흘간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가 입소한 부대는 대게릴라 특전부대인 그린 베레의 훈련 장소다. 우즈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그린 베레로 두 차례 참전했다.
2006년 5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우즈는 군에 대한 집착을 가졌다.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실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비디오를 즐겨 봤고, 관련 게임을 할 때는 메이저대회에서 경기할 때처럼 몰입했다고 그의 코치를 했던 행크 헤이니가 빅미스라는 책에 썼다. 2006년 US오픈 18일 전에도 네이비 실에서 사흘간 입소 훈련을 했다. 헤이니가 “정신 나갔느냐, 잭 니클라우스의 기록을 깨지 않을거냐”고 하자 우즈는 “지금까지 이룬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진지하게 골프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려 고민했다. “나이 제한 때문에 (입대가) 어렵지 않느냐”고 헤이니가 묻자 우즈는 “해군에서 나를 위해 특별 면제 조항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고 답했다. 헤이니는 “‘우와, 지구상 최고의 운동선수, 어쩌면 역사상 최고의 운동선수가 전성기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군인이 되려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책에 썼다.
(제공=Gettyimages)
우즈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2년 동안 비밀리에 자주 네이비 실 훈련을 했다. ‘2등은 첫 번째 패배자’라는 말도 거기서 배웠고, 장병들에게 “골프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루에 열 차례 낙하훈련을 포함해 특수부대 요원들이 받는 훈련을 다 했다. 맨손 육박전 훈련을 받았고 전투화를 신고 6.4㎞ 구보를 했다. 강한 바람이 부는 윈드 터널에서도 훈련했다. 우즈는 이 훈련을 매우 즐겼는데 담당 의사는 그 소식을 듣고 무릎 부상 악화를 우려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심 전투 훈련장인 킬 하우스(kill house)에서도 훈련을 했다. 거기서 고무탄에 맞아 생긴 야구공만 한 멍을 헤이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우즈는 헤이니에게 “당신을 2초 안에 죽일 수 있다”고도 했다. 헤이니는 “그러지 마라”고 농담으로 받았지만 섬뜩했다고 한다. 킬 하우스에서 우즈가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고 헤이니는 본다. 우즈는 숨이 턱까지 찬 상태에서 전우들과 함께 군가를 부르는 등의 진짜 사나이 같은 역할도 즐겼다. 우즈는 진정으로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섹스 스캔들에 빠진 이유는 군인이 되려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해 다른 곳에 분출한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봤다. 건빵 안에 있는 별사탕을 먹지 못했으므로.
건빵 별사탕이 성욕감퇴제라는 설은 사실 여부를 떠나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이 비인간적이므로 군대도 비인간적이다. 동부화재 프로미 오픈에 참가했다 컷통과에 실패한 상무 선수들은 산길을 걸어서 대회장까지 나와 연습을 해야 했다. 좀 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김무영 감독의 “군대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에 수긍이 갔다.
위에서 언급한 오빌 무디, 어니 엘스, 레티프 구센의 공통점은 군 출신에 US오픈 우승자라는 점이다. US오픈은 가장 어렵다. 좁은 페어웨이와 긴 러프, 시멘트처럼 딱딱한 그린 등으로 선수들의 피를 말리는 무대다. 군대처럼 비인간적이다.
구센은 메이저는 US오픈에서만 두 번 우승했다. 구센이 우승할 때 너무 덥고 코스가 어려워 다들 녹아내렸는데 혼자 멀쩡했다. 그 때 “구센은 10대에 벼락을 맞은 적이 있어 보통 인간이 아니다”라는 농담이 나왔다.
무디는 유일한 PGA 투어 우승이 US오픈이었다. US오픈은 너무 어려워서 뛰어난 선수들이 탈락하고 오히려 실력이 처지는 선수가 운 좋게 우승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럴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가 무디, 또 한국의 김주연 등이다.
그래도 그 더운 여름 날 열린 US오픈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선수가 무디였다. 그래서 그가 승리했다고 본다.
세 선수가 군 경험을 했기 때문에 US오픈 우승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전혀 관계가 없지도 않을 것 같다. 골프 사에 가장 위대한 장면 둘은 다리를 절뚝이며 2008년 US오픈에서 우승한 타이거 우즈, 교통사고 후인 1950년 US오픈에서 우승한 벤 호건이라고 본다. 두 선수 모두 군과 관련이 있다.
최경주도 그렇다. 다들 한국 남자 골퍼는 국제 경쟁력이 없다고 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 8승을 했다. 타이거 우즈에게 처음 메이저 역전패를 안기고 2010년 한국 오픈에서는 10타 뒤지다 노승열에 역전승한 양용은도 그렇다.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일들을 그들이 해냈다.
('국방부 시계는 천천히 간다. 허인회가 헤드커버에 적어 놓은 제대 날짜.')
허인회 일병도 동부화재 프로미 오픈 최종라운드에서 선두에 7타 뒤에서 출발해 역전승했다. 허인회는 두 번의 연장전 두 번째 샷이 모두 정상급 프로 선수 답지 못했다. 150m도 되지 않는 곳에서 두 번 다 그린에 올리지 못했다. 그는 “입대 후 체력훈련을 많이 해 몸이 바뀌어 샷감은 좋지 않지만 체력과 정신력에서 좋아져 우승했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답지 못했으나 군인다웠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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