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를 개최하는 오거스타내셔널 클럽하우스 [사진=마스터스]
올해로 87회를 맞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올해 첫 메이저 마스터스가 미국 조지아 오거스타의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장에서 열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골퍼들이 검색하는 골프장 정보 사이트 ‘톱100골프코스닷컴’에 따르면 오거스타내셔널은 세계 100대 코스 중 12위에 올라 있다. <골프매거진>은 지난해 11월호에서 미국 100대 코스 중에서는 7위로 꼽았다.
오거스타내셔널은 미국 남부에 위치해 9월말에 개장해 이름해 마스터스에서 절정을 이루고 4월말이면 휴장에 들어가는 골프장이다. 회원은 300명 미만인데 전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주로 회원이고 한국인도 2명이 회원이다.
골프장 부지는 원래 농장이었다. ‘미국 아마추어 골프의 영웅’이자 설립자인 보비 존스는 <골프는 나의 게임>에서 처음 부지를 찾은 느낌을 ‘오거스타내셔널에 처음 방문한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긴 길(330야드)의 목련(매그놀리아 레인)은 아름다웠고, 2피트 두께의 석조 벽이 있는 오래된 장원 주택은 매력적이었으며 희귀한 나무와 관목들은 매혹적이어서 골프장을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보비 존스와 설계가 매킨지 [사진=마스터스]
오거스타내셔널은 원래 과수원이었고 클럽하우스는 1854년에 과수원 관리동으로 지어졌다. 옥탑방에는 까마귀 둥지라는 전망대를 두었는데 관리자가 올라가서 과수원을 전부 조망하던 일종의 초소였다.
벨기에 출신 버크맨스(Berckmans) 가족이 이 부지를 사서 나무와 꽃식물을 심었다. 지금은 파3 6번 홀 뒤에 인조 퍼팅 그린과 고급 레스토랑 프로샵을 갖춘 버크맨스하우스가 있어 세계 주요 기업 VIP고객들이 일주일에 수천만원을 주고 이곳에 머물며 경기를 관전한다.
골프장 공동 설립자 존스는 캘리포니아 해안의 사이프러스포인트 설계자를 찾아낸 뒤 1931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앨리스터 매킨지에게 코스 디자인을 의뢰해 이듬해 12월에 개장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여서 매킨지는 설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원래 1만 달러를 받아야 했으나 좋은 코스를 만들겠다는 매킨지의 열정이 넘친 가운데 5천 달러만 받고도 설계하기로 했고 결국 2천 달러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런데 더 아쉬운 건 매킨지가 1934년 1월에 사망하면서 마스터스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초기엔 골프장 회원 모집도 잘 안됐다. 대공황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시절이라 창립 회원을 1800명 모집하려고 존스가 수천 장의 초대장을 보냈으나 응한 이는 거의 없었다. 세금 포함 350달러의 가입비와 60달러의 연간 회비에도 불구하고, 제1회 마스터스(당시엔 오거스타내셔널인비테이셔널)가 다가오자 고작 76명의 회원만 있었다.
클리포드 로버츠 [사진=마스터스]
오거스타내셔널과 마스터스를 오늘날의 ‘명인열전’으로 키워낸 건 다른 공동 설립자 클리포드 로버츠의 공이 크다. 뉴욕의 금융인 출신이었던 로버츠는 시대를 앞서간 감각으로 골프 대회를 멋진 이벤트로 만들었다. 하지만 초기였던 2차 세계 대전 2년(1943~1944년)은 운영을 중단했고 소들을 페어웨이에 방목시켰다.
마스터스가 메이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여러가지가 지적된다. 원래 설립자 존스는 US오픈을 개최하고 싶었으나 6월에 대회를 치르자니 코스가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4월 첫째주가 개최 시기가 됐다. 플로리다에서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취재하고 올라오는 스포츠 기자들을 대회장으로 끌어들이면서 관심을 높여나갔다. 이후로도 마스터스는 기자들에게 극진하게 대접하는 전통이 생겼다. 매년 기자 공로상도 이 대회에서 수여한다.
대회 이름은 원래 오거스타내셔널인비테이셔널이었으나 신문 헤드라인에 쓰기엔 너무 길었다. 대회를 치른 지 6년 뒤인 1939년이 되어서야 로버트의 주장대로 대회명이 마스터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1935년 제2회 대회에서는 원래 개장했던 아웃-인 코스를 바꿔서 경기했고 자연스럽게 아멘 코너(11-13번)가 후반 코스에 나오게 됐다. 아웃 코스는 높은 곳이면서 양지바른 곳에 있어 서리 피해가 없었다. 그래서 두번째 대회를 열기 전에 홀 레이아웃을 바꿨다. 그리고나서 바로 그해 진 사라센이 15번 홀에서 알바트로스를 잡으면서 결국 우승하며 흥행이 성공했다.
명예의 시타 행사 [사진=마스터스]
이 대회를 통해 오늘날 골프의 여러 전통이 유래했다. 대회 전에 역대 챔피언이 티샷하는 ‘명예의 시타’ 행사는 올해로 60년을 맞이했다.
1963년 대회는 명예의 시타자 조크 허치슨과 프레드 맥리오드가 1번 홀에서 티샷을 날리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전통은 계속되어 올해는 그린재킷을 6번 입은 잭 니클라우스, 3번 입은 게리 플레이어, 지난해 처음 합류한 대회 2승의 톰 왓슨과 티샷을 하면서 공식 경기 개막을 알렸다.
우승자에게 입혀주는 그린재킷도 원래는 회원을 구분하는 상의였다. 1937년 대회에서 로버츠는 갤러리(패트론)가 도움이 필요할 때 오거스타내셔널 회원을 빨리 구분하라는 의미에서 회원들은 모두 그린재킷을 입었다. 샘 스니드가 1949년 우승한 뒤로 회원이 입는 그린재킷을 수여하면서 이후로는 우승한 역대 선수들은 이 기간에 코스에서 그린재킷을 입는다.
또한 마스터스 역사상 놀라운 업적을 기념하는 세 개의 다리가 후반에 있다. 파3 12번 그린으로 가는 길에 건너가는 호건 브릿지는 호건이 72홀 최저타 기록(14언더파 274타)을 세운 지 5년 만인 1958년에 헌정됐다. 13번 홀 티샷을 마치고 래의 개울을 건너는 넬슨 다리는 바이런 넬슨이 1937년 우승했을 때 12번 버디, 13번 이글을 했던 기억을 살렸다. 15번 홀의 사라젠 다리는 1935년의 알바트로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으로 건너가는 돌다리로 조성했다.
챔피언스 디너 [사진=마스터스]
현재 화요일 저녁의 챔피언스 디너는 벤 호건이 1951년 우승한 뒤 이듬해에 개최했다. 원래는 교통사고도 당했고 힘들게 재활해서 US오픈도 우승한 호건이 마스터스까지 우승하고는 이듬해 대회 전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 게 시작이다. 그 얘기를 들은 클리포드 로버츠가 그 이벤트를 후원하면서 대회의 연례 행사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일본여자오픈이 이런 전통을 이어받았다.
토너먼트 전날에 열리는 전통적인 파3 콘테스트는 1960년에 처음 열렸는데 올해 선수와 가족들이 참여하는 이벤트로 열렸다. 한국에서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메이저인 하이트진로챔피언십에서 특정 홀들을 몇몇 선수들이 부친과 함께 경기하는 패밀리골프 챌린지를 진행하기도 했다.
잔디는 원래 난지형 잔디인 버뮤다그래스에서 40년 전인 1981년에 그린을 한지형 잔디인 벤트그라스로 전면 변경했다. 이후 그린에는 그린을 히트, 쿨링하는 서브에어가 전세계에서 처음 적용됐다.
비올 때 금방 물이 빠지고 잔디가 잘 자랐다. 마스터스에 설치는 공짜로 해줬는데 그곳에 깔렸다는 이유로 서브에어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려 싱가포르의 센토사, 한국에서는 나인브릿지, 트리니티 등에서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