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는 올해 1월부터 골프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진 신중혁, cooperation 유앤아이 테니스 아카데미]
순한 양의 가면 뒤에 숨은 지치지 않는 승부사 기질을 보지 못했다면 진짜 이상희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매력적인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이상희를 만났다.
이상희는 올해 1월부터 테니스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테니스 클럽을 잡게 된 이유가 중요했다. 골프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반영됐다. 이상희는 “코치 앨런 윌슨이 비시즌에 다른 스포츠를 권유해 라켓을 잡았다. 테니스를 하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말에 곧바로 등록부터 했다”고 털어놓았다.
스윙이 좋은 선수로 손꼽히는 이상희는 프로 통산 4승을 거두고 있다. 그래도 약점이 있다. 몸의 회전이 부족하고 뻣뻣한 편이다. 샷 실수가 나올 때마다 부족한 몸의 회전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상희는 “테니스가 몸의 회전과 임팩트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힙 턴은 확실히 좋아지고 있는 느낌이다”고 설명했다.
체중이 7kg이나 불어난 몸을 예전으로 돌리는 과정에서도 테니스는 유용했다. 이상희는 “갑자기 체중이 불어나니까 단점이 많았다. 몸이 불어난 상태에서 운동을 하면 체격이 좋아지는 건 맞다. 하지만 꾸준히 운동을 못하면 늘어지고 힘들어진다”며 “체중을 줄이고 근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웨이트트레이닝만 한다고 살이 빠지진 않는다. 유산소운동이 필요한데 마침 활동량이 많은 테니스가 도움이 됐다”고 뿌듯해했다. 이상희는 체중을 빼서 다시 70kg대로 돌아왔다.
이상희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다. 그는 “옛날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스키도 탔다. 하체 단련 때문에 태권도를 오래 했고, 검은 띠까지 땄다. 그리고 아홉 살 때부터 골프를 했다”고 말했다. 운동을 쉽게 습득했던 편이라 처음에는 테니스도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휘두르는 건 비슷한 원리지만 움직임이 많은 동적인 테니스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이상희는 “테니스는 몸과 공 간격이 중요하고, 하면 할수록 어렵다. 골프는 순간적으로 힘을 써야 하는 종목이다. 테니스는 뛰어야 하는 종목이라 체력, 민첩성, 순발력도 중요하다”고 했다.
골프와 테니스의 차이점은 뚜렷하다. 골프는 멈춘 공을 치고, 테니스는 움직이는 공을 때려야 한다. 이상희는 “움직이는 공이든, 정지해 있는 공이든 잘 쳐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집중력이 똑같이 중요하다. 공을 타격했을 때 힘을 쓰는 방법과 원리 터득이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테니스의 민첩성과 순발력도 골프에 도움이 된다”고 분석했다.
▶ 흐름 휘어잡는 서정적인 승부사
2011년에 투어에 데뷔한 이상희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투어 통산 4승을 챙겼다. 그중 메이저 대회에서 3승을 수확했다. KPGA선수권을 비롯해 매경오픈과 SK텔레콤 오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래서 ‘승부사’라는 닉네임도 붙었다.
첫해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승부사 기질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상희는 2011년에 호기롭게 프로 무대를 누볐지만 톱10 1회에 그치며 시드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기회는 마지막 대회였던 NH농협 오픈뿐이었다. 4개 대회 연속 컷 탈락을 하는 등 페이스가 떨어졌던 이상희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대회에 나섰다. 1, 2라운드에서 1타씩 줄이며 간신히 컷 통과를 했던 그는 자신감을 되찾고 3라운드에서 6타를 줄이며 우승 경쟁에 합류했다. 그러고는 최종 라운드에서 4타를 줄여 12언더파로 생애 첫 승을 신고했다.
첫 우승은 골프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세6개월10일의 나이에 정상 등극은 역대 KPGA 최연소 프로 우승 기록이었다. 이로 인해 이상희에게 ‘천재 골퍼’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이상희는 “첫 우승을 했을 때 일주간 잠을 못 잤다. 눈을 뜨면 ‘꿈이야 생시야’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며 웃었다. 이듬해 이상희는 KPGA선수권 우승을 비롯해 톱 클래스의 플레이를 펼치며 KPGA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순박하고 얌전한 이미지지만 클럽을 잡으면 매서운 집중력으로 필드를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빛났다. 순한 양에서 ‘맹수’로 둔갑해 독한 승부 근성을 뽐내는 이상희의 진면목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상희는 필드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흐름을 잡아채는 승부사다. 서정적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처럼 흐름을 타면 우승까지 홀인하는 유형. 평소에는 안단테 템포로 산책하는 느낌이 강하다. 경기에 돌입하며 모데라토 템포를 시작으로 알레그로, 비바체 템포까지 빠르게 치고 나간다. 이상희는 “경기의 흐름을 중요시한다. 특히 첫날 성적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느낌, 찬스가 왔다고 생각되면 나도 모르게 집중이 되면서 확 치고 나간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첫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다고 딱 한 가지 특별한 전략을 짜진 않았다. 그는 “첫날 전략을 정한다고 해서 성적이 잘 나오진 않더라. 다만 그 주에 잘 되는 클럽이 있다. 그래서 코스 매니지먼트를 구상할 때 잘 되는 클럽을 좀 더 살리는 방향으로 결정한다. 잘 안 될 때는 멀리 보낸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이 아니더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중압감이 심한 순간에 긴장감을 해소하는 방법도 귀띔했다. ‘슬픈 노래 듣기’가 자신만의 노하우다. 이상희는 “최종 라운드 때는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물론 코스 매니지먼트 전략이 있지만 긴장을 즐기는 선수가 우승하는 것 같다”며 “긴장하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계속 생각한다. 그러면 기분이 착 가라앉으며 차분해진다. 지난해 매경오픈에서 우승할 때도 가수 김나영의 ‘가끔 내가’라는 노래를 계속해서 들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고 강조했다.
▶ 마지막 퍼즐 완성 꿈꾸는 ‘메이저 킹’
이상희는 매년 한국오픈에 포커스를 맞춘다. KPGA투어의 메이저 대회 중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게 한국오픈이다. 한국오픈마저 정복한다면 ‘메이저 킹’의 퍼즐이 완성되는 셈이다. 이상희는 “골프를 시작하면서부터 메이저라고 생각했던 KPGA선수권, 매경오픈, SK텔레콤 오픈, 한국오픈에서 우승하고 싶었다. 올해 위시리스트 중 한국오픈 우승이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고 했다. 이상희는 2013년 대회에서 우승 문턱까지 간 적이 있다. 로리 매킬로이가 출전한 대회에서 3언더파를 기록하며 매킬로이와 나란히 2위를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청년 이상희는 매년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목표 달성에 더욱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프로 데뷔 후 가장 많은 상금(약 8억원)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타이틀 방어도 처음으로 도전해야 하는 목표다. 그는 “지금껏 매경오픈에서 2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없다고 들었다. 2013년 KPGA선수권에서 연장전 끝에 김형태 프로에게 패해 아쉽게 타이틀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타이틀 방어를 하고 싶다.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는 건 그만큼 준비를 잘했다는 방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 무대에서도 해결해야 할 빚이 있다. 2014년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JGT 챔피언십에서 억울하게 우승을 놓쳤다. 17언더파로 요시타카 다케야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끝내 연장전을 앞두고 있었지만 경기위원회가 갑자기 이상희에게 2벌타를 부과한 것. 11번 홀에서 퍼터 헤드로 그린을 눌렀다는 이유였다. 아직 열도에서 우승이 없는 이상희는 “팬들에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 당시에는 왜 벌타인지 받아들이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바닥을 치는 기분도 들었다. 힘들어하던 모습이 고스란히 TV에 나왔다. 좌절하는 모습을 봤을 텐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뚝심을 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상희는 올 시즌을 앞두고 처음으로 한 달 보름 동안 골프클럽을 잡지 않았다. 대신 테니스 등을 접하며 단점과 체력 보완에 힘썼다. 충분한 휴식기를 가졌다는 건 자신의 골프에 믿음과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상희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지만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다. 이상희가 한국오픈 우승으로 메이저 킹의 퍼즐을 완성한다면 그 업적은 이상희 골프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 같다.
▶ TALK+
Q. 외모 중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어렵다. 덧니가 매력적이라는 얘기를 들어봤다. 그래서 교정을 안 했다. 의사 선생님이 교정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만류했다. 성형을 한다면 다 하고 싶다(웃음).
Q. 이상형과 결혼관이 있다면.
이상형은 잘 모르겠다. 일단 성격이 중요하다. 운동을 하니까 이해심 많은 친구가 좋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만나고 있다. 부모님도 연애에 긍정적이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t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