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홀 연장의 승자 신지애와 폴라 크리머. [현수 레오 김]
늘씬한 미녀 폴라 크리머가 그린의 라인을 응시했다. 10m가 넘고, 약간 내리막에 왼쪽으로 휘어지는 라인이다. 그래도 퍼트를 잘 하는 폴라 크리머였고 자신감도 넘쳤다. 18번 홀 주위를 가득 메운 갤러리들은 미국 최고 스타 폴라 크리머가 우승을 차지해 핑크빛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주기를 기대했다. 퍼트는 완벽해 보였다. 넓은 원을 그리며 왼쪽으로 휘어지던 공은 스피드도 적당해 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공은 홀에 살짝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런데 홀을 건드리면서 오히려 스피드가 붙어 1.2m 정도 지나갔다. 애매한 거리였다.
우승을 확신한 듯했던 크리머는 볼에 마크를 하면서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동반자인 듀이 클레어 슈리펠이 퍼트를 하는 동안 크리머는 퍼트 연습을 여러 차례 했다. 캐디 콜린 칸이 회전이 잘 되도록 크리머의 어깨를 돌려줬다. 크리머는 기다리는 동안 입맛을 여러 차례 다셨고, 눈을 감고 마음을 평정하려 애썼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크리머는 홀 뒤로 10미터 정도나 물러나 라인을 봤다.
신지애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지애가 경기 때 미소를 짓는 것은 나쁜 의도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 선수들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신지애와 경기하면서 잘 풀리지 않을 때 상대방이 그의 웃는 모습을 보면 ‘너 정도는 여유 있게 이긴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나고 경기가 더 안 풀린다. 박인비에게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붙인 미국 골프 채널 해설자인 주디 랭킨은 신지애를 두고는 “미소짓는 암살자(Smiling assassin)”라고 했다. 웃는 모습이 더 섬뜩할 때가 있단다.
크리머는 퍼트를 당겼다. 조금 전 12m 버디 퍼트는 홀에 살짝 들어갔다 나왔는데 1.2m 파 퍼트는 홀을 스치지도 않고 지나갔다. 긴장하면 퍼트를 당긴다. 관중들의 아쉬운 탄성 소리가 제임스강가에 울려 퍼졌다. 두 선수 모두 16언더파. 연장전이었다. 이제 진정한 매치플레이를 치르게 됐다.
2012년 9월 미국 버지니아주 킹스밀 리조트 리버코스에서 열린 킹스밀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다. 로레나 오초아 은퇴 후 LPGA의 대표적 스타가 될 걸로 보였던 두 선수는 2년 동안 우승을 하지 못한 터였다. 4라운드를 2타 차 선두로 출발한 크리머가 신지애에게 마지막 홀까지 한 타 차 리드를 끌고 와서 버디 기회를 잡았는데 3퍼트를 하면서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크리머는 스코어카드를 적어 내는 텐트에서 먼저 서둘러 나와 카트를 타고 페어웨이에서 내렸다. 그 곳에서 세컨드샷을 연습했다. 대회 내내 크리머가 18번 홀에서 2번째 샷을 하던 자리는 거의 일정했다. 크리머는 그 곳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려는 거였다. 외국 선수들은 혹은 평범한 선수들은 그런 대범한 연습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건 최고 스타인 크리머의 권리였다.
정규경기 18번 홀에서 크리머는 3퍼트로 신지애를 살려줬다. 연장 첫 홀에서 신지애는 2m 버디 퍼트를 놓치면서 크리머를 살려줬다. 크리머는 신지애가 퍼트를 빼는 장면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기쁜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신지애는 웃었다. 신지애는 실망했을 때 웃는 경향이 있다.
두번째 연장, 홀에 들어갈 것 같던 크리머의 퍼트가 홀 앞에서 약간 왼쪽으로 휘었다. 크리머가 아쉬움에 팔짝팔짝 뛰었다. 신지애는 3미터 버디 퍼트를 했다. 신지애의 볼도 왼쪽으로 휘었다. 평소 점잖은 신지애도 아쉬움에 펄쩍 뛰었다. 제임스강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유유히 흐르는데 킹스밀의 긴장감은 점점 더 커졌다.
정규경기가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선수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네 번째 연장전 페어웨이에서 크리머는 앞에 있는 가방을 치워달라고 신지애의 캐디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신지애의 경험 적은 캐디 로드리게스가 헐레벌떡 달려와 캐디백을 치웠다.
연장전이 길어진 이유가 있다. 홀의 위치가 너무 어려웠다. 그린의 길이는 41야드나 됐는데 마지막 라운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핀이 그린 뒤쪽에, 또 왼쪽 벙커와 가까운 곳에 꽂혔다. 핀과 그린 뒤쪽 사이에 공간이 적기 때문에 그린을 넘어가면 파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왼쪽 벙커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벙커는 상당히 좁고 바로 옆이 물이어서 직접 공략하기가 부담스럽다. 신지애와 크리머 모두 과감하게 핀을 공략하지 못했다. 클럽을 길게 잡았다가 그린에 튕기고 넘어가면 방법이 없었다. 절대 그린을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왼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그린 가운데를 향해 공을 쳤다. 홀의 위치가 경사지여서 멀리서 퍼트를 성공시킬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홀 주위에서도 넣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보통 연장전을 한 번 치른 후엔 다른 홀로 옮겨서 경기한다. 이날은 바꿀 수 없었다. 경기가 그냥 끝날 것으로 보고 미국 골프 채널이 17번 홀까지 카메라 등 장비를 다 철수해 버렸다. 현대 스포츠는 TV가 주도한다. 거액의 중계권료를 지불하는 중계방송사가 원하지 않는 건 하기 어렵다. 미국 골프 채널은 18번 홀에서 연장이 그렇게 오래 진행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홀을 바꾸지 않으면 핀 위치를 바꿔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핀 위치를 바꾸지 않은 것은 LPGA 경기위원회의 실수다. 위원회는 “방송 중 홀 위치변경은 시간이 걸리고, 연장이 곧 끝날 거라고 예상해서 그냥 진행했다”고 했다.
다섯 번 째 연장 두 선수는 어프로치샷을 홀 약 6m 정도 거의 비슷한 곳에 떨궜다. 크리머의 퍼트는 매우 좋았다. 홀 바로 앞에서 멈춘 것을 빼면 그랬다. 체조 선수 출신이어서 몸놀림이 매우 유연한 크리머는 또 아쉬운 표정으로 허리를 접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이 나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불만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오버액션, 카메라가 크리머를 자주 비추는 이유 중 하나다.
신지애의 퍼트는 성공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크리머의 퍼트 위치와 비슷했고 크리머가 완벽한 라인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신지애가 퍼트하는 동안 크리머는 쭈그려 앉아서 초조한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크리머가 뭔가를 기원하고 목걸이를 만졌다면 성공이었다. 신지애도 잠깐 하늘을 바라보더니 또 웃었다.
태양은 더욱 힘을 잃고 있었다. 신지애의 캐디 로드리게스는 여섯 번째 연장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자 지친 표정으로 카트에 올라탔다.
일곱 번 째 연장. 신지애는 재킷을 입었다. 추워서라기보다는 근육을 따뜻하고 유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신지애는 재킷을 벗고 시원하게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똑바로 멀리 나갔다. 페어웨이 한 가운데에, 크리머보다 15야드 정도 멀리 나갔다. 크리머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연장전이 지긋지긋했는지 모험을 걸었다. 핀을 직접 공략했는데 약간 왼쪽으로 가면서 벙커쪽으로 갔다. 벙커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경사지라 스탠스가 아주 좋지 않은 곳이다. 신지애는 좋은 찬스였지만 샷을 한 후 웃었다. 약간 얇게 맞았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낮게 날아간 공은 그린 앞쪽에 맞고 30야드 정도 굴러가 핀 7m 옆에 멈춰 섰다.
크리머의 라이는 생각보다 더 나빴다. 왼쪽 다리를 완전히 굽히고 오른 다리는 펴야 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지였다. 자칫하다간 샷을 하다 미끄러져 벙커로 빠질 것 같기도 했다. 크리머는 여러 번 연습스윙을 하고 샷을 했다. 완벽한 칩샷이었다. 공은 핀쪽으로 굴러갔다. 들어가는 걸로 짐작한 갤러리들이 환호를 질렀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크리머는 아쉬움에 러프에 누워버렸다.
신지애는 옅은 색안경을 벗었다. 버디 퍼트 방향은 아주 좋았으나 짧았다. 이번엔 웃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아쉬움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어려운 곳에서 파 세이브에 성공한 크리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일곱 번 째 연장에서도 승부를 보지 못한 두 선수를 경기위원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데 더 할 수 있겠느냐?” 크리머는 “물론”이라고 했고 신지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 카트를 탔다. 경기가 중단될 것으로 생각했던 관중들은 환호를 했다.
텔레비전으로 긴 연장전 중계를 본 시청자들은 경기를 계속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을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TV에 나오는 것보다 현장은 훨씬 어두웠다. 카메라는 어두우면 밝게 보정을 한다. TV 화면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또는 보여주지 않는다.
태양은 완전히 사라졌다. 크리머가 패션용으로 쓰는 폴리스 선글라스도 자취를 감췄다. 제임스강을 수놓던 주황색 낙조도 색깔을 잃었다. 여덟 번째 연장, 크리머의 아이언샷은 정확히 핀방향으로 날아갔다. 임팩트와 동시에 잘 맞았다는 걸 느낀 크리머는 눈을 점점 크게 뜨면서 핀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바라봤다.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크리머는 이글이 될지도 모른다고 느낀 것 같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 짧았다. 크리머는 실망했지만 분명한 버디 기회였기에 성큼성큼 그린으로 걸어갔다. 신지애는 정규경기에서 크리머가 3퍼트를 한 곳에서 버디 퍼트를 해야 했다. 내리막이고 멀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터라 정규경기 때의 크리머보다 더 불리했다. 크리머는 신지애가 3퍼트 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신지애는 홀에 딱 붙였다. 신지애의 공을 보고 크리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크리머는 신중했다. 퍼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콜린 칸의 동의를 구했다. 노련한 캐디인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머의 공은 정확히 홀쪽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고 느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공은 홀 앞에서 왼쪽으로 휘었다. 한숨 소리가 리조트에 울려 퍼졌다. 킹스밀 리조트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기위원회에서 두 선수에게 다가와 이제 그만하고 내일 아침 9시에 16번 홀에서 하자고 했다. 크리머는 “더 할 수 있다”고 했다. 위원회는 벌써 오후 7시32분이니 오늘은 더 못한다고 했다. 크리머는 완강했다. 크리머는 “나는 더 할 수 있다. 오늘 끝내고 싶다”면서 신지애에게 “너는 어떠냐. 나는 할 수 있으니까 너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실제로는 강한 권유였다.
신지애는 잠시 생각하더니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머는 위원회에 “그럼 우리 계속하는 거다”라고 했다. 위원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크리머의 캐디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도 크리머는 계속 하고 싶다고 우겼다. 신지애는 수동적이었다. 실제로 경기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경기를 더 보고 싶은 관중들과 크리머는 하자는 쪽이었다. 아직도 관중석을 가득 채운 갤러리들은 완전히 본전을 뽑겠다는 심산에서 “경기를 계속하라!”고 함성을 질렀다. 관중들과 크리머가 워낙 입김이 셌다.
크리머가 절충안을 냈다. 그럼 티잉 그라운드로 가서 한 번 상황을 보자고 했다. 다들 동의하고 카트에 탔다. 관중들이 환호했다.
티에 가서도 한 번 더 된다, 안 된다 논쟁이 있었다. 크리머는 “하자”, 또 “하자”고 신지애를 설득했다. 연장을 한 번 더 할지를 결정하는데서도 분명 홈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신지애도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크리머는 드라이버의 헤드커버를 벗기고 신지애는 점퍼를 벗었다. 크리머는 티를 꽂고 연습 스윙을 했다. 어드레스하려는 듯 공에 다가가다가 그냥 공을 집어 들었다. 고집 센 크리머도 이길 수 없는 어둠이었다. 결국 어둠만이 신지애와 폴라 크리머의 ‘킹스밀 혈투’를 뜯어말릴 수 있었다. 팬들은 아쉬움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신지애는 “우승이 쉬운 게 아닌 줄 알지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웃었다. 크리머는 26홀을 함께 경기한 신지애와 어깨동무를 했다. 키 차이가 꽤 났다.
크리머는 스타의식이 강하다. 어릴 때 체조를 했다. 허리에 부담이 되어 보이는 스윙으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건 체조로 다져진 유연성에서 나온다. 그녀는 체조하다 부상을 당한 뒤 학교에서 치어리더로 활동했다. 미국에서 여학생들에게 치어리더는 매우 인기가 있다. 그의 부모는 크리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을 응원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응원을 받을 것인가?” 크리머는 바로 치어리더를 그만두고 골프에 전념했다. 크리머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선수다.
새로운 태양이 떴다. 크리머의 내리막 1.2m 파 퍼트가 빠졌다. 크리머는 패배를 알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채 그린 구석으로 가서 짝다리를 짚은 채 신지애의 파퍼트가 들어가는 걸 봤다. 마라톤은 끝났다.
기자가 보기에 LPGA 투어에서 가장 격렬한 격전이었다. PGA 투어에서 가장 긴 연장은 11홀이다. 1949년 모터 시티 오픈에서 이 기록이 나왔는데 그들은 연장이 길어지자 더 이상 승부를 짓지 않고 공동 우승으로 처리했다.
두 선수는 연장 8개 홀에서 모두 파를 했다. 버디 찬스를 한 번도 살리지 못했는데, 보기 위기는 모두 파로 막았다. 비슷한 거리라도 버디는 넣지 못하고 파 퍼트는 어떻게든 홀에 집어넣었다. 두 선수가 어려운 18번 홀에서 8홀 연장을 치르면서 모두 파를 한 것은 진기록이다. 사람들은 승리를 앞둘 때보다 패배를 눈앞에 뒀을 때 더 필사적이다. 킹스밀 혈투는 최고의 샷만이 나온 건 아니지만 인간 내면의 불안함과 실수, 또 이를 극복하려는 정신력과 의지를 보여준 명작이었다.
신지애는 다음 주 브리티시 여자오픈의 강풍 속에서 9타 차 승리를 거뒀다.
이번 주 킹스밀에서 다시 킹스밀 챔피언십이 벌어진다. 랭킹 1, 2, 3위 리디아 고, 박인비, 스테이시 루이스 등이 겨룬다.
킹스밀 챔피언십이 열리는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한국으로 치면 경주 같은 사적 도시다. 제임스타운은 1607년 영국인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식민지인데 영국인들이 보급물자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거주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종의 미스터리로 인디언의 공격과 내부 반란 등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애도 올해부터 이 곳에서 모습을 볼 수 없다. 미국에서 신지애는 부상과 외로움, 동기 상실 등으로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샷거리 등 경기 스타일을 보면 일본이 더 어울릴 듯도 하다.
그래도 킹스밀에서 LPGA 투어가 열릴 때 신지애는 9홀 연장 격전을 치렀던 킹스밀 리버 코스 18번 홀을 생각할 것이다. 어둑어둑한 땅거미 속에서 치렀던 그 경기가 신지애 인생의 가장 밝게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LPGA 투어의 역사에도 오래 남을 것이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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