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데이비스의 후계자 찰리 헐 [사진 신중혁]
찰리 헐은 유나이티드 킹덤의 자존심이다. 첫인상은 차갑고 시크하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 천재로 주목 받았던 그는 이제 세계 무대에서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가고 있다.
영국은 ‘골프의 성지’로 불린다. 엄밀히 말하면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가 골프의 성지이지만 영국에서는 골프가 대륙적으로 성행했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링크스가 영국을 대표하는 코스들로 전 세계 골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래서 해리 바든(1870~1937)과 같은 불세출의 골프 스타가 등장하기도 했다.
남자 골프에서는 영국 출신들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2016 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저스틴 로즈와 2017년 유러피언투어 올해의 선수 토미 플릿우드 등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여자 골프에서는 ‘장타 퀸’으로 명성을 알린 로라 데이비스 이후 잉글랜드 출신의 스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영국인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영국 골프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줄 유망주를 손꼽아 기다렸다. 2000년대 들어 마침내 로라 데이비스의 적자인 ‘골프 천재’가 등장했다. 두 살 때부터 고사리 손으로 골프 클럽을 잡으며 신동 기질을 뽐낸 찰리 헐이 그 주인공이다. 탄탄한 체격에서 내뿜는 호쾌한 장타와 시원시원한 플레이를 펼치는 헐은 단숨에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럽의 리디아 고’ 최연소 기록 제조기
1996년 3월생인 헐은 런던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잉글랜드 노샘프턴셔주 케터링에서 태어났다. 헐은 아홉 살 때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열린 이벤트 대회에서 성인들을 모두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다른 또래들과는 행보가 달랐다. 학업과 골프를 병행하는 시스템을 박차고 나와 홈스쿨링이라는 파격 행보를 택한 것이다. 그는 “당시에는 프로 골퍼가 너무 되고 싶었다. 이전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행했지만 어려움이 많아 홈스쿨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골프에 전념한 그의 성장 속도는 빨라졌다.
2012년 만 16세에 출전한 메이저 대회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도 ‘사고’를 쳤다. 그는 컷 통과를 넘어 공동 38위에 오르며 골프계를 놀라게 했다. 헐은 “ANA 인스퍼레이션(전 나비스코 챔피언십)이 열리는 미션힐스의 다이나쇼어 코스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항상 기다려지고 꼭 우승하고 싶은 대회”라며 의욕을 드러냈다.
그는 이듬해 아마추어 무대라는 좁은 울타리를 걷어차고 프로에 입문했다. 2013년 그는 입문과 동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에서 5개 대회 연속 준우승(랄라 메리엄컵, 남아공 여자오픈, 터키항공 여자오픈, 딜로이트 레이디스, 유니크레딧 독일 여자오픈)을 차지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17세 소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해 8월, 헐은 유럽과 미국의 대륙대항전인 솔하임컵에 단장 추천으로 뽑혔다. 헐은 역대 최연소 솔하임컵 대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이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 헐은 젊은 패기를 앞세워 팀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마지막 싱글매치에서는 폴라 크리머를 상대로 5홀 차 승리를 챙기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승1패를 기록한 헐 등의 활약에 힘입어 18-10으로 승리한 유럽은 미국 대륙에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헐은 2013년에 우승은 못했지만 LET 신인상을 수상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 (LPGA)투어에서 최연소 우승 기록(15세 4개월)을 세웠던 리디아 고와도 비교되며 ‘유럽의 리디아 고’로도 주목을 끌었다. 헐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는 딱히 없다. 당시에는 우승 벽을 넘지 못하는 이미지가 생겨 태연한 척했지만 이런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털어놨다. 다음 해 18세 생일을 나흘 앞둔 헐은 마침내 프로 무대 첫 우승을 거뒀다. 모로코에서 열린 LET 랄라 메리엄컵에서 5타 차 열세를 뒤집고 짜릿한 우승을 차지했다. 최종 라운드에서 9언더파를 몰아치며 연장전에 돌입했고, 첫 홀에서 버디를 낚아 감격적인 첫 승을 거뒀다. 2014년 헐은 LET 최연소 상금왕과 최연소 올해의 선수에 오르는 등 유럽 대륙을 정복했다.
▶'팔방미인' 장타자 메이저 퀸 꿈
기량을 검증 받은 헐은 2015년부터 퀄리파잉(Q)스쿨을 거쳐 LPGA투어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260야드 이상의 장타와 날카로운 아이언 샷을 지닌 헐은 순조롭게 적응했다. 드라이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거리도 뒤처지지 않았기 때문에 렉시 톰슨, 에리야 쭈타누깐과도 대등한 파워 게임이 가능했다. 헐은 “어릴 때부터 세게 치는 연습을 많이 했다. 공격적으로 공략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장타의 비결을 묻자 “무조건 세게 쳐야 한다”며 시크하게 답했다. 그는 “290야드도 충분히 멀지만 파5 홀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초반이긴 하지만 올해 평균 드라이브샷 거리 263야드로 데뷔 후 최장타를 날리고 있다.
LPGA투어 첫해 숨 고르기를 했던 그는 2016년부터 치고 나왔다. 첫 메이저 대회인 ANA인스퍼레이션에서 리디아 고에 1타 뒤진 준우승을 차지했다. 본인의 메이저 최고 성적표였다. 그리고 시즌 최종전인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유소연을 2타 차로 따돌리고 마침내 LPGA투어 첫 승을 신고했다.
헐은 첫 승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승하고 나서 투어가 조금 더 편해지고 마음도 안정됐다. 더불어 자신감도 생겼다.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면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아직 젊지만 나름의 여유도 묻어났다. 그는 “아직 22살이다. 언제나 대회에 출전하면 우승하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헐은 ‘메이저 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메이저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퍼트를 보완해야 한다. 헐은 2017년 평균 퍼트 수가 30.23개(122위)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린 적중 시 퍼트 수도 1.79개(42위)로 정상급 수준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비시즌 동안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퍼팅에도 변화를 줬다”며 다부진 각오를 드러냈다.
시즌 출발도 나쁘지 않다. 호주여자오픈에서 7위를 차지했고, 혼다 타일랜드 13위, HSBC 여자월드챔피언십 16위로 상위권에 포진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브리티시여자오픈이 가장 우승하고 싶은 대회다”라며 굳은 각오를 드러냈다. 헐의 골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수들은 남자 골퍼들이다. 잉글랜드 출신으로 메이저 2승을 챙긴 토니 재클린이 그의 정신적 지주다. 헐은 “플로리다에 있는 재클린의 집에 찾아가서 연습도 하고 많은 조언을 들었다. 휴식을 적절히 취하는 방법까지도 상세히 알려준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또 다른 영웅은 타이거 우즈다. 헐은 “우즈가 롤모델이다. 가장 오랫동안 우즈의 게임을 지켜봐왔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라며 치켜세웠다. 헐도 우즈나 재클린 같은 전설의 발자취를 걷기 위해선 우선 메이저 우승이 필요하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t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