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 스피드 137마일. 320~30야드는 거뜬히 날리는 박찬호는 소문난 골프 마니아다. 은퇴 뒤 우울증을 떨쳐내는데 골프 도움을 얻었다. [사진 이지연]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JTBC 파운더스컵 개막을 하루 앞둔 17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와일드 파이어 골프장.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 박찬호(43)가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찬호는 이날 전반 9홀에서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9·뉴질랜드), 후반 9홀에선 시즌 2승을 기록 중인 장하나(24·비씨카드)와 함께 프로암(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하는 대회)을 치렀다.
박찬호은 소문난 장타자다. 첫 홀부터 티샷을 300야드 이상 날려보내 동반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좌측으로 휜 도그레그 홀인 3번 홀(385야드)에서는 과감하게 왼쪽으로 가로지르는 티샷으로 무려 345야드나 볼을 날려보냈다.
전형적인 파워 히터인 박찬호는 하체 리드로 빠르게 클럽 헤드를 끌어내리면서 최대 137마일(220km)의 드라이버 헤드 스피드를 기록한 적이 있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투어 평균(113마일·181km)은 물론,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127마일·204km)보다도 빠른 기록이다. LPGA투어 장타자로 손꼽히는 장하나는 “클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캐리(날아가는 거리)로만 평균 300야드 이상을 날려보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박찬호의 골프 사랑은 남다르다. 2012년 은퇴 뒤 한동안 우울증을 겪은 그는 골프 클럽을 잡으면서 우울증을 떨쳐냈다. 박찬호는 “화려했던 시절을 보낸 선수일수록 은퇴 뒤 우울증으로 약물이나 알코올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한동안 심리 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골프’라는 집중할 거리가 생기면서 그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찬호는 골프 안에서 야구를 한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투수는 손으로 볼을 던지고, 골퍼는 클럽을 사용해 볼을 날린다는 것이다. 박찬호는 “투수가 정확하게 볼을 던져야 타자를 아웃시킬 수 있다면, 골퍼는 타깃을 향해 정확하게 볼을 날려 보내야 타수를 줄일 수 있다. 타자를 아웃시키기 위해 스피드가 아닌 항상 일정한 릴리즈 포인트로 투구를 해야 하듯이 골퍼도 일정한 루틴을 밟아야 일관된 샷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매니지먼트나 멘탈 컨트롤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야구와 비슷하다고 본다. 박찬호는 “투 스타라이크를 잡았다고 욕심을 부리면 안타를 맞을 수 있듯이 골프도 그린까지 볼을 잘 올렸더라도 과욕을 내면 버디가 보기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그는 3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력에 이글을 다섯 번이나 했다. 베스트 스코어는 76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요즘도 1주일에 1~2번 라운드를 하고, 하루에 500~600개의 볼을 칠 만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박찬호는 “4개월 만에 70타 대 타수를 쳤지만 얼마 뒤 100타로 내려갔다. 그 뒤로 더 겸손함을 배웠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 뿐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만들기 위해 연습을 늘 시합처럼 한다. 그 뒤로 골프도 더 재미있어 졌다”고 말했다.
9번 홀에서 박찬호는 리디아 고 캐디에게 캐디빔과 캐디 백을 빼앗아 메고 리디아 고에게 조언하는 흉내를 내 동반자들에게 큰 웃음을 안겼다. 리디아 고는 “첫 몇 홀은 너무 긴장돼 제대로 샷이 안 됐다. 그러나 유머러스함과 자상한 조언에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프로니까 알려줘야 하는데 오히려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97년생인 리디아 고는 박찬호가 미국 무대에 진출하고 4년 뒤에 태어났지만 세대 차를 넘어서 대선배와 나눈 교감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는 박찬호에게도 마찬가지. 박찬호는 “골프를 시작하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고 말했다.
피닉스=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