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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세컨드샷-리디아 연대기, 위기의 시작

성호준 기자2015.04.07 오전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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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고가 ANA 2라운드 18번홀에서 물에 빠진 공을 확인하려 호수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승승장구했던 리디아 고는 최연소 랭킹 1위라는 타이틀과 연속 언더파라는 기록의 짐을 진 상태에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재미없어졌다.”

리디아 고가 ANA 인스피레이션 2라운드가 끝난 후 이런 말을 했다. 연속 언더파 기록이 물속에 빠진 날이었으니 재미없을 만했다. 드라이버는 이리 저리 휘어졌고 긴 러프 속, 나무 뒤에서 간신히 파 세이브를 해가며 버텼는데 마지막 버디 기회인 18번 홀에서 공이 물에 들어가 화가 날만도 했다. 리디아 고는 “드라이버가 페어웨이에 간 게 한 두 번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기록상으로 페어웨이에 간 티샷은 6번인데 워낙 드라이버를 잘 치는 선수였으니 심정적으로는 그 정도로 느꼈을 것이다.

“재미없어졌다”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심한 말을 할만도 했다. 화가 나서 인터뷰도 안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선수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리디아 고라서 의아했다. 리디아 고는 긍정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괴로울 때도 그의 화법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난 2월 싱가폴에서 열린 HSBC에서 박인비와 우승경쟁을 하다 패한 후 리디아 고는 이렇게 말했다. “(졌지만) 그래도 마지막 홀 버디로 끝냈고 3주간 아주 잘 했다. 세 개 대회에서 우승 두 번, 준우승을 한 번 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대단했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거둔 가장 좋은 성적이기도 했고 내년 이 대회가 기다려진다.”

이런 게 리디아 고였다. 가식이 아니다. 그는 순수하고 세상을 밝게 본다. 천성적으로 그런 듯 하고 교육자 집안에서 긍정적인 교육을 받았다. 리디아 고를 두고 판타지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를 빗대 ‘리디아 연대기’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가 어리고 대단한 활약을 해서이기도 했지만 동화 속 주인공처럼 약간 비현실적으로 세상을 밝게 보는 캐릭터 같기도 해서였다.

유소연은 “화가 나는 상황이 되어도 리디아 고는 항상 행복해 보이는데 그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골프는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골프는 재미있고, 골프 코스에 나오면 행복하고, 열심히 하면 댓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보는 시각도 성선설 경향이 농후해 보인다. 세상은 갈등이 아니라 조화와 협력 관계라고 느낀다. 경쟁자가 잘 할 때 진심으로 박수를 치는 몇 안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리디아 고의 스윙 기술 보다 강력한 무기인 것으로 느껴진다. 박원 JTBC 골프 해설위원은 리디아 고가 잘 하는 이유에 대해 “아직 두려운 것을 몰라서 골프가 재미있기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매우 설득력 있는 얘기라고 본다. 골프는 어렵게 생각하면 한 없이 어렵다.

그런 리디아 고가 골프가 재미없어졌다고 했다. 뭔가 달라졌다. 그는 세상의 풍파를 경험하고 있다. 최근 3중고 속에서 경기했다. 역대 최연소 나이에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것이 첫째다.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는 부담감,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그를 옭아맨다. 그 짐은 매우 무겁다. 이를 오래 짊어진 타이거 우즈나 안니카 소렌스탐이 그래서 대단한 것이다.

그 위에 연속 라운드 언더파 기록이라는 무게까지 얹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니카 소렌스탐을 따라가야 하니 허리가 휘청했을 것이다. 미디어가 기록에 대해 자꾸 물어보고 카메라가 바짝 쫓아다녀 성가시기도 했을 것이다.

리디아 고는 “기록 신경 안 쓰고 한 샷 한 샷에만 집중하겠다. 기록은 초밥을 몇 개 먹었다 정도로 생각하겠다”고 했다. 신경 안 쓰겠다고 대답한다고 해서 정말 신경 안 쓰는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얘기하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선수들이 신경 안 쓴다고 말하는 건 신경 안 쓰려 노력하겠다는 자기 주문일 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신경 쓴다는 얘기다. 선수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상식적으로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리디아 고가 ANA 인스피레이션 2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두 번째 샷을 물에 빠뜨린 건 러프에서 쳐서 공이 평소보다 멀리 날아간 이른바 플라이어 현상도 있겠지만 기록 부담에 눌려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때렸을 가능성도 크다. 공이 평소보다 멀리 날아간 이유가 물리적으로 무엇이든 평소에 나오기 매우 어려운 현상이 나온 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고통은 스윙 교정이다. 리디아 고는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새 스윙을 배우고 있다. 연속 언더파 신기록을 목전에 두는 등의 압박감 속에서 몸은 예전의 습관과 새롭게 배운 스윙을 왔다 갔다 한다. 레드베터의 스윙은 압박감 속에서도 일관된 스윙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계적인 스윙인데 이 스윙은 오히려 감을 중시하는 선수들을 지나치게 분석적, 기계적으로 만들고 천부적인 감을 줄어들게 하기도 한다. 압박감 속에서 매우 취약한 스윙이라고 말하는 선수들이 더러 있다.

골프 바깥에서도 아마추어 시절 산업은행의 편법지원 논란 등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일들이 나왔다.

리디아 고는 29라운드 연속 언더파 타이기록과 신기록을 앞에 둔 ANA 1, 2라운드 보기를 9개 했다. 두 라운드 보기 수는 지난 3개 대회 12라운드에서 한 보기 숫자와 같다. 대회 직전까지 드라이버 정확성이 82%였던 리디아 고는 ANA 4라운드 동안 54%로 69위였다. 리디아 고의 기술 중 큰 장점은 퍼트였는데 이번 대회 퍼트 수는 128개로 112위였다. 임경빈 JTBC 골프 해설위원이 “리디아 고는 벙커를 우습게 본다”고 할 정도로 벙커샷을 잘 했던 그는 이 대회 벙커 세이브율이 20%에 그쳤다.

그러면서 골프가 재미없다고 했다. 긍정 밖에 모르고, 세상이 한 없이 재미있기만 하던, 그래서 승승장구하던 천재 소녀가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경기를 하면서 골프가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ANA 최종 성적은 71-73-74-73타로 3오버파 공동 51위였다. 첫날만 언더파고 나머지 사흘은 오버파다. 유럽투어 포함 33라운드 연속 언더파를 치던 리디아 고가 3연속 오버파를 친 것이다. 코스가 어려운 메이저 대회라 해도 3라운드 연속 오버파는 리디아 고 답지 않다.

연속 기록을 세우다 끊어진 후 허탈감에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일종의 2년차 징크스일 수도, 성장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이 현상의 원인은 ‘골프가 재미없어졌다’라는 그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리디아 고가 두려움이라는 괴물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처럼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옮겨온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한다.

리디아 고는 영원히 동화 속 피터팬일 수 없다. 석가모니의 말처럼 인생은 고통의 바다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고해의 풍파를 거치고 이겨야 한다.

골프는 극단적인 멘털 스포츠이기 때문에 폭풍은 매우 크고 오래 갈 수도 있다. 미셸 위는 골프가 재미없어진 후 이를 극복하는데 5년 이상 걸린 듯하다. 송아리, 김송희 등 일부 천재 소녀들은 이 폭풍을 만난 후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리디아 고가 그 정도로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최근 보여줬던 '치면 언더파' '나가면 톱 10' 같은 퍼포먼스는 쉽지 않을 것이고 최정상을 유지하기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다행인 것은 리디아 고에게 닥친 이 파도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폭풍의 크기는 본인이 정하는 것이란 점이다. 리디아 고는 매우 현명한 선수다. 리디아 고가 이 폭풍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리디아 연대기의 첫 번째 위기, 새로운 챕터라고 본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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