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롤렉스 세계 랭킹 1위 릴리아 부(미국), 세계 랭킹 3위 셀린 부티에(프랑스), 세계 랭킹 2위 인뤄닝(중국)
202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시안 파워(Asian Power)’다.
미국과 유럽팀의 대항전인 솔하임컵을 제외하고 33개 대회 중 26개 대회에서 아시아 국적 또는 아시아계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표 참고). 약 78.8%에 달하는 수치다.
5월에 열린 국가대항전 한화 라이프플러스 인터내셔널 크라운(태국 우승)을 제외하더라도 아시아 출신 선수가 32개 대회에서 25번 우승(약 78.1%)을 차지했다.
아시안 파워는 현재 롤렉스 세계 랭킹을 비롯해 2023년 LPGA투어 각종 기록 부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세계 랭킹 10위까지 10명 중 8명이 아시아 지역 출신이다. 베트남계 릴리아 부(미국 · 세계 랭킹 1위)를 비롯해 태국계 셀린 부티에(프랑스 · 세계 랭킹 3위), 한국계 이민지(호주 · 세계 랭킹 5위) 등은 부모가 모두 아시아인이다.
중국의 인뤄닝과 린시유가 각각 세계 랭킹 2위와 10위에 올라 있고 한국의 고진영과 김효주가 각각 6위와 7위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지난해 신인상을 받은 아타야 티띠꾼(태국)이 세계 랭킹 9위다.
미국의 넬리 코다(세계 랭킹 4위)와 잉글랜드의 찰리 헐(세계 랭킹 8위)이 10위 이내에 진입한 하얀 피부의 선수들이다.
2023년 LPGA투어 상금 순위를 보면 아시안 파워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상금 순위 20위까지 아시아 출신이 아닌 선수는 6위의 찰리 헐, 14위의 브룩 헨더슨(캐나다) 그리고 20위 넬리 코다 등 단 3명뿐이다.
상금 랭킹 3위에 오른 앨리슨 코퍼스(미국)는 필리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상금 랭킹 19위의 앨리슨 리(미국) 역시 아일랜드인 할아버지와 한국인 할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한국계다.
LPGA투어 상금 랭킹 19위에 오른 미국의 앨리슨 리
올해의 선수상 부문 역시 상위 10명 중 9명이 아시아 출신 선수이며 신인상 부문 역시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아시안 피가 흐르고 있다.
올해의 선수상 부문 공동 8위의 에인절 인(미국)은 중국계이며 신인상 부문 2위의 그레이스 김(호주)은 한국계이다.
아시안 웨이브: 아시아 출신 골퍼가 왜 강한가
이처럼 LPGA 무대에서 올해 유독 아시아 선수들의 강세가 이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박세리’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건 우리나라에만 ‘세리 키즈’가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박세리의 활약상을 보고 영향을 받은 선수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걸쳐 존재했다. 그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갔고 투어를 점령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의 박인비를 비롯해 신지애, 최나연, 박희영, 유소연 등이 우승컵을 모두 쓸어 담았고 중국의 펑샨샨, 대만의 쩡야니, 일본의 미야자토 아이, 태국의 주타누깐 자매 등이 자기 나라를 대표해 LPGA 무대에 섰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민지(호주), 박세리, 유소연, 허미정, 박희영
세리 키즈는 아시아인으로 투어를 정복하며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박세리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들 역시 ‘골프 대디’를 자처하며 혹독하게 자녀를 훈련시켰다.
넷플릭스 영화 <티샷: 골프 여제 에리야>는 주타누깐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새벽에 일어나 공동묘지를 뛰는 장면이 나온다. 주타누깐 아버지는 한때 박세리가 공동묘지를 뛰며 훈련했다는 스토리를 접했고 이것을 두 딸의 담력 훈련에 적용했다.
이처럼 전 세계의 세리 키즈는 박세리처럼 되고 싶었고 박세리처럼 투어를 정복하고 싶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이들 박세리 키즈의 활약을 보고 꿈을 키운 다음 세대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에리야 주타누깐은 ‘태국의 박세리’라 불리며 세계 랭킹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에리야 주타누깐을 롤모델로 삼은 아타야 티띠꾼(2003년생), 샤네티 완나샌(2004년생) 등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新)동력이 만들어졌다.
중국 역시 비슷하다. 박세리 키즈 중 한 명인 펑샨샨을 롤모델로 삼고 성장한 2002년생 인뤄닝이 LPGA투어에 등장했고 그는 거침없이 리더보드 상단을 수시로 점령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 미야자토 아이를 롤모델로 골프 선수를 꿈꾸던 하타오카 나사(1999년생), 후루에 아야카(2000년생), 사소 유카(2001년생) 등이 LPGA투어 상금 순위 20위권 내에 올라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혜진(1999년생)과 유해란(2001년생) 등이 투어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성유진(2000년생), 홍정민(2002년생) 등도 LPGA Q 시리즈에 도전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이 MZ세대 아시안 골퍼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 선수들이 지배하던 미국 무대를 군웅할거 시대로 만들었다.
2023 LPGA 롤렉스 플레이어스 어워드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왼쪽부터) 미국의 릴리아 부, 중국의 인뤄닝, 태국의 아타야 티따꾼, 미국의 로즈 장
각 나라를 대표하는 확실한 롤모델이 존재하는 것도 아시안 파워를 견인했지만 또 하나는 바로 부모의 말에 순응하고 잘 따르는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이나 유럽, 오세아니아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아시아인 특유의 성정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다. 부모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가족 중심의 사고를 하는 아시아계 선수들은 강압적인 분위기일지라도 묵묵히 훈련에 매진하며 그것이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한눈팔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아시안 선수들이 성장기를 지나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실력의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잠재되어 있던 실력이 그제야 비로소 폭발하기 시작한다.
박세리에서 시작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시아 국가의 주니어 골퍼의 마음속에 광풍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다시 시작된 또 다른 날갯짓이 현재 더 큰 아시안 웨이브를 만들어냈다.
아시안 웨이브는 LPGA투어 시즌 초반과 후반에 진행되는 아시안 스윙의 범위와 규모를 점점 넓혀가고 있다. 투어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들의 활약이 계속될수록 해당 지역 기업이 관심을 갖고 주니어 선수들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어쩌면 아시안 웨이브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 큰 힘을 가진 강력한 파도가 전 세계를 집어삼킬 날이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